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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소화 데레사(1873 - 1897) : 작은 꽃

 

  '작은여왕', '소화 데레사'라는 애칭으로 널리 불리우는 데레사 성녀는 북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 알랑송에서 출생. 원래 이름은 '마리 프랑스와 데레즈'이며, 그녀가 갈멜 수녀원에 들어간 생활한 곳인 리지외라는 지명을 붙여 리지외의 데레사라고도 한다. 그녀의 부친 루이 마르뗑은 시계제조업을 하였으며 그녀의 어머니 이름은 젤리 궤렝이었다. 부모는 신심이 두터웠으며 9명의 자녀를 두었고 데레사는 막내딸이었다. 데레사는 8세 때에 리지외에 이사하여 당시 분도회 소속학교에 들어가 공부했다. 그는 9세 때 중병에 걸렸는데 성모님께 기도하고 성모님의 미소를 통해 치유되었다.

(그녀의 생가가 있는 리지외의 뷔쏘네(Bussonet)에는 그녀가 기도한 성모상과 그녀가 아버지에게 수녀원에 보내달라고 청원하는 석상이 보존되어있다.)

  데레사는 이미 갈멜 수녀회에 들어간 세 언니와 함께 리지외에 있는 수녀원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승낙을 받지 못했다. 그후 아버지와 함께 로마로 순례여행을 갔을 때 교황님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갈멜회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순례자들은 교황께 반지나 친구하고 어려워 말을 못하고 있었는데, 데레사는 자기 차례가 되어 어리지만 수녀원에 들어갈수 있도록 청원했다. 계속 청원하자 교황은 '딸아 안심하라 하느님의 뜻이라면 꼭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위로하였다고 한다.

  데레사는 귀국후 주교님께 편지를 보냈고 얼마 후 수녀원에서 허락이 왔다. 원장은 그를 시험하려고 3개월을 기다리라고 했고, 기다린 후 드디어 1888. 4. 9 갈멜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녀의 나이 15세 되던 해였다. 데레사는 언니 수녀들과 함께 9년간 수녀원에서 살며 수녀원 빆은 나오지 않았다.

  소화데레사는 "나는 우리 주 예수님을 위해서 굉장한 일을 하고 싶다. 먼 나라에 가서 선교사로 일하고 싶고. 예수님을 위해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싶은데 나는 너무나 작아서 그런걸 못한다. 할 능력이 없다" 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 네 벽으로 둘러싸인 조그만 수도원 안에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작은 일 뿐이다. 작은 일 중에서도 마룻바닥을 닦는 것, 비질하는 것, 빨래하는 것. 이런 소소한 일밖에 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녀는 기도를 많이 하는 것 외에는 평범하고 작은 일들밖에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인들은 아주위대한 사람들이고 큰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소화 데레사는 "아, 내가 드디어 깨달았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아주 소소하고 작은 일을 할 때라도 그걸 예수님의 사랑으로 꽉 채우면 내가 거룩하게 된다"라고.....그러니까 "마루바닥에 떨어져있는 바늘 하나를 주을 때도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그걸 주우면 그런 행위 하나로 영혼 하나를 구원 할 수 있다"는 성인의 길을 깨달은 것이다. 성녀는 짧은 생애동안 조용한 수도생활 속에서 특히 작은 일에 충실하고 겸손하였으며 복음적 단순성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폐결핵으로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순명과 신뢰로 극기의 덕을 기르며, 하느님에 대한 열애로 죄인들의 회개, 선교사들을 위한 기도와 사랑실천에 대해 그녀의 자서전인 "한 영혼의 이야기"에서 잘 말해주고 있다.

  그녀는 1897년 9월30일 숨을 거두면서 말하였다. "오, 저의 하느님,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저의 소명, 마침내 저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제 소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의 품안에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안에서 저는'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녀는 특히 선교사들을 위해서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하고 편지를 하였는데 그의 순박한 정신이 교회의쇄신과 선교지역에서 신앙을 전파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당시 베트남에 선교하고 있던 파리외방션교회소속 선교사 테오도르에게 보낸 편지는 유명하다 (Je serais I'Amour dans I'Eglise catholique mamere). 사랑이 있어야만 선교사가 자기 고향을 떠나 외국으로 선교하러 갈 수 있으며, 사랑이 없으면 선교할 수 없기에 데레사성녀는 교회 안에 사랑이 되어 그 역할을 하겠다는 뜻이다.)

  하느님과의 일치의 길로써, 자신의 작음과 불완전을 받이들이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전적으로 신뢰하며 희망을 두는"작은길"을 발견하기까지 데레사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약함을 경험해야만 햇고, 또한 이 약함을 통하여 하느님늬 자비와 전능하심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갈멜 수녀원에 들어와서는 특히 아버지의 정신병으로 인한 고통을 통하여 이 세상으로부터 이탈되는 은총을 받았으며, 그 다음으로는 특히 기도에의 메마름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가난과 무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자신으로부터 이탈되어 작고 겸손해졌다. 또한 데레사는 구약성서의 잠언9,4과 이사야66,12-13을 통하여 하느님이신 예수님 안에서 자비의 모성적 얼굴을 봄으로써 하느님께 가는 신뢰와 위탁의 작은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1895년 6월 9일, 삼위일체 대축일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당신의 사랑을 통교하고 싶으신지를 더욱 깊이 깨달아 자신을 자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희생 제물로  봉헌하였으며, 그 이후로 데레사는 자신안에서 정화하시며,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깊이 감지할수있었다.

  데레사는 1897년 5월 "오, 마리아!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성모님께 대하여 장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서 데레사는 복음을 통하여 성모님께서도 이 유배의 삶 안에서 눈물을 흘리셨던 것을 보면서, 더더욱 자신은 성모님의 딸임을 느끼며, 자신의 약함과 작음을 보면서도 결코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러한 것들이 성모님의 숨겨진 덕인 겸손으로 그녀를 이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별히 이러한 겸덕은 탁월하게 데레사를 성모님의 딸이되게 한다. 그러므로 성모님과 데레사의 이런 유사성 안에서 데레사는 한 어린아이가 그의 엄마를 따라가는 것처럼 성모님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즉 성모님이 데레사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특히 이 시에서 데레사는 작은길의 어머니요 모범으로서 성모님을 소개한다.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요, 모든 성인들의 여왕이시지만, 나자렛에서 가난하게 사셨고, 어떠한 기적이나, 탈혼, 황홀함도 없이, 신앙의 평범한 길을 걸으셨다. 왜냐하면 이땅에는 작은 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성모님을 향하여, 두려움 없이 다가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천국으로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비할 데 없으신 성모님께서 쾌히 걸으신 길은 작은자들의 길인 신앙의 평범한 길이었다고 노래하였다. 이렇게 작은길은 향주덕인 믿음, 희망, 사랑으로 사는길이며, 그리고 이 향주덕은 하느님 외에 모든 것으로부터 영혼을 보호하기에, 하느님과 영혼과의 합일에로 완전하게 이끌어 주는 길임을 보여준다.

  데레사는 1925년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라는 이름으로 성인품에 올랐으며,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포교사업자의 수호자'로 선포되었다. 그녀는 오늘날도 작고 평범한 생활 가운데 그리스도의 덕을 실천하는 극기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선교사업의 가장중요한 사랑의 열정을 주는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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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비꽃 비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영혼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늘나라에 가서 어떤게획을 세우고, 사람들을  위해 어떤일을 할 건지 여러분이 아신다면 나는 내 소명을 행할 것입니다.  영혼들에게 내 작은 길을 보여 주기 시작할 것입니다. 내 소명이란 내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처럼 그들도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일입니다. 사랑하올 하느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나는 하늘나라에 머무는 대신에 이 세상 끝날까지 지상에서 마물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하늘나라에 머무는 대신 선한일을 행하겠습니다. 나는 돌아오겠습니다. 다시 내려오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쁨을 주지 못한다면  나는 하늘나라에서 불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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